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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친숙함의 미학,그 확장성에 대한 소론

  내외적 상황에서 획득한 현상의 언어는 작가 손현욱 작업의 조형성을 대리한다. 하나의 대상에 반응함으로써 그 본래의 물자체는 해체되거나 재구성되고, 의미 명료한 채 부유하는 확정적 사변은 개념과 관념의 틈에서 노획한 이미지에 얹혀 안착된다. 어찌 보면 매우 친근하기만 한 그 이미지들은 일정한 감각과 이성적 논증이 잉태 가능한 실체의 변곡에서 자라며, 새로운 관계의 합을 지닌 상태에서 인식력은 배가된다. 시각을 관통하는 사물과 그것에 응답하는 감각 인식의 실체적 구동은 작가가 지향하는 표상에 관한 하나의 알고리즘이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재구성된 그의 이미지들은 외형상 독립성을 전제로 하되, 주체와 타자 간 양극을 오가는 ‘관계’에서 성장한다. 이때 개입하는 것이 바로 ‘인위적 매개’로써 표면적이거나 일면적인 감정 인식을 궁극적으로 결정짓는 층위의 목도이며, 이를 통해 감각 인식과 이성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통로는 확보된다. 이것이 작가 손현욱 작품에 대한 일차적 해석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가 만들어내는 단순화 되어진-단조로움이 아닌-이미지들은 불가분한 다원적 시각화를 지정한다. 이는 보이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무형의 변주까지 포괄하는 것으로, 인식과정의 단계와 그 자체로써 감성적 인식 및 이성적 인식의 끝없는 상호 교환성의 선점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작가 손현욱에게 이 두 인식은 그의 작업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방법론일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론 본형(本形)의 의미를 재구성함으로써 또 다른 ‘관계’를 꾀하는 그만의 방식이랄 수 있다. 흥미로운 건, 작가 작업에 녹아 있는 ‘매개’로써의 관계란 존립 가능한 터전에 놓일 때 더 이상 홀연한 개체로 제시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어쩌면 모든 것을 수용한 채 특정한 무언가를 지배하는 무의식적인 기초 체계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기초가 존립된다는 것이 옳으며, 이와 같은 필자의 견해는 하나의 사물이 본질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명제(命題 : 상호성과 연계성)가 자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의 또 다른 의도이자 방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 <The Connection>에 선보이는 작품들도 같은 범주에 든다. 기존 작업에서 확인되던 동물의 형상은 여전히 그의 주된 형상으로 되풀이되지만 마치 그림자 같은 단면은 잠시 뒤로 미뤄진 채 조각 본연의 입체성을 띠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형태와 구조의 변화], 조각 특유의 공간점유현상이나 그의 작업에서 중요하게 작동하던 유머러스한 심리적 코드 역시 고스란히 살아 있으나 보다 풍부한 ‘은유의 여백[blank of metaphor]’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별은 존치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작업의 중심은 앞서도 설명했듯, “독립적인 조형물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가지의 대상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써 존재한다는 것”에 있다. 김해문화의전당 이영준의 말처럼 “작가의 작품이 가지는 형태의 단순함 못지않게 이야기를 압축하는 작가의 탁월한 자질”은 유효하고 그로부터 발현된 이미지도 여전하지만, 귀여운 겉모습과는 달리 남성성에 관한 허욕과 허상까지 포박했던 과거의 작품 대비 확대된 카테고리를 통해 메시지를 확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과거의 작업과 일정한 거리감을 제공한다. 그리고 ‘대상을 연결하는 매개체’를 상징하는 것은 다양한 색을 지닌 선(線)과 양방향으로 구성 된 나팔 구조 등이다. 이 각각의 것들은 2015년 신작들에서 공통적으로 엿보이는 장치들이다. 이는 구체적으론 작품을 확장하는 유무형의 선이며, 작가의 표현처럼 “관통하는 경로이자 통로”이다. 또한 결련, 연결, 결부 등을 함의하는 조형적 도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생각해봐야할 것은 과연 ‘연결의 종국’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작가의 의도에 따르면 그것은 “장소[site]와 공간[space], 사람[human] 등 그 외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것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소통의 경로로써의 작품을 포함해 상호되는 매개체로서의 작품, 연결고리로서의 작품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작가 또한 이와 같은 상호작용을 “작품이 대중 속에서 더 깊이 관계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의도”에 있다고 말한다. 결국 손현욱 작가의 작품 의도는 대중과의 소통에 방점이 있다 해도 그르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면 대중과의 소통은 원만할 수 있을까. 대답은 일단 “그렇다”이다. 지각 가능한 형상, 미소를 짓게 하는 정서, 부담 없는 색, 명료한 주제의식에서 대중과의 소통은 무리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일상 속 친숙함의 미학을 생성하는 다양한 공공미술작품이나 작품 소장 목록에서도 그 대중과의 소통은 불편함에 무게를 두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작가가 의도하는 예술의 가치는 어느 정도 완성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고찰할 문제는 인식의 기초 체계 혹은 무의식적인 기초 위에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에 어떤 조형적 질서를 덧대는 방법론에 있어 현재 이상의 어떤 가치 또한 필요한 것은 아니냐는 것에 관한 자문이다.

쉽게 말해 순차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인 개연성도 없는 온갖 잡다한 의식의 편린이 동시다발적으로 편재하는 동시대미술의 분열증적 증세와, 하나의 의식만이 올곧이 자리한 채 다른 의식들이 증발하는 현대미술의 편집증, 그 둘 사이에 자리 잡을 수 있는 방백(傍白)은 어떻게 완성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방백은 즐거움과 기쁨, 행복을 전달하는 심미적 역할과는 다소 다르다. 이미 미술사에 등재되어 접근 가능한 형식과도 다르다. 물론 손현욱의 지금 작업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통해 예술이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 언어들을 소구시켜 다시 한 번 우리네 삶을 들여다보고 사고하고 사유하며 응답할 수 있도록 한다면, 그래서 확실히 속 깊은 미학적 범주로까지 귀속된다면 그가 쌓아가는 예술의 의미는 보다 값지지 않을까라는 것의 다른 말이다.

 특히 손현욱이 제시한 작품들에서 실체는 무엇이고 현상은 무엇이며, 이때의 반응에 있어 표상은 어떤 지형을 구축 하는가 등을 되물을 수 있다면, 아니 그의 작품을 접했을 때 그러한 사고와 사유의 확장이 훨씬 심화적이라면 그의 예술은 매우 폭 넓은 위치와 종심에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예술이란 언제나 그 길에서만이 새로운 나침반을 형성해왔으며,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을 극복할 때 비로소 달성할 수 있는 단계에 설 수 있다. 작가의 입장에서 예술을 한다는 건 단지 심미적 고찰을 확대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예술적 이상을 발견하고 다시 해체하는 수순을 반복해 진지하면서도 진솔하게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차이’[역사적이든 동시대적이든, 그 어느 단계를 대입한들]의 본 모습이다. 손현욱은 위와 같은 경로에 불필요하지 않을 만큼 대입적이다. 나아가 오늘날 그의 작업은 흡사 뉴런처럼 진화하고 성장하며 멈추지 않은 채 진군하는 중이다. 존재함으로써 반응하고 반응함으로써 차이를 가져오는 근원적 구조에 다가서기 위한 흔적들이 엿보이는 것 또한 틀림없다. 우리가 그의 조각들에서 그가 말하는 차이를 어렵게나마, 혹은 보다 깊게 차연을 느낄 수 있는 것도 그와 같은 외부와의 반응이 존재함을 인식하기에 가능한 것이고, 자동적으로 그것에 반응함으로써 완성됨을 수용하는 탓이 크다. 즉, 반응이 구조를 변경하고 연이어 미끄러지면 고착된 내재란 성립될 수 없음을 간접적으로 포용하는 셈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손현욱의 작품 변화가 지닌 의미는 미래적 관점에서 보면 긍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번 전시는 그 하나의 내외적 계기로써 자리할 것이고.

홍경한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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